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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막부 말기 동란기의 외국인 살상 사건인 나마무기 사건(그 1)

최종 갱신일 2024년 11월 7일

구로카와 쇼산
<사진은 구로카와 소산>

1862년, 1862년 8월 21일 구 동해도의 일어촌 나마무기 마을에서 일어난 영국인 살상 사건을 전해 주는 나마무기 사건비가 요코하마시 쓰루미구 나무기 1초메, 국도 15호선과 구 동해도의 교류 지점, 기린 맥주 요코하마 공장의 일각에 세워져 있다.
비석에는 사건 당시의 세정과 이 땅에서 비업의 죽음을 당한 영국 상인 리처드슨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가 적혀 있다.이 비는 타치바나키군구제의 제3대구 4소구의 부토장을 하고 있던 구로카와 소조에 의해 1885년(1883년)에 세워진 것이다.


나마무기 사건 번역문

에도 시대에 편찬된 「신편 무사시 풍토 기고」에 「도카이도가 걸리는 해안의 땅에서, 가나가와, 가와사키의 2숙 사이에 있어 가나가와에 일리, 가와사키에는 일리반은 되어 있어, 에도 니혼바시에서 롯사토의 거리에 있다.자안향에 속해, 안양사의 과거장에, 옛날에는 키시무라(기시무라라고도 쓴다)이라고 칭하고 있었다.또 마을명의 일어나는 것은 도쿠가와 장군이 에도 입국 때, 나마무기를 깎아 길에 깔았다고 하는 것으로부터 나마무기라고 하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에도 시대, 나마무기는 미나 야가우라의 하나로서, 에도의 장군가에 어패류를 헌상하고 있었다.바지나 아카가이도 많이 잡혔다.자안에서는 조개봉이 명산이었다.나마무기 어부들은 조개를 뜯어 조개껍질을 길에 깔고 있었다.조개인 '생무키'에서 벗어나 '나마무기'가 된 것은 아닐까 한다.하얀 조개껍질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이 근처의 길은 조개각도로 불렸다.……。
장군님이 지나간다고 해서, 생활을 지지하는 소중한 보리, 그 보리를 열매 앞에 깎아 길에 깔 정도의 소박한 인정이 넘치고 있던 나마무기.바닷바람이 불어 건너는 소나무나미목과 하얀 조개껍질의 길이 계속되던 해골어촌 이마보가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140년 전인 1862년의 일이다.1862년 8월 21일 오후 2시경에 일어난 사쓰마 번에 의한 영국인 살상 사건이라는 불행한 사건에 의해 나마무기 마을의 이름은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되게 되었다.

나마무기 사건의 흔적
나마무기 사건노토


문책 「쓰루미 역사의 모임」 사이토 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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