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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회:막부 말기 동란기에 일어난 외국인 살상사건을 전하는 나마무기 사건
- 제1회:막부 말기 동란기의 외국인 살상 사건인 나마무기 사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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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막부 말기 동란기의 외국인 살상 사건인 나마무기 사건(2)
최종 갱신일 2021년 4월 12일
참근교체의 다이묘·고나의 행렬을 익숙한 나마무기의 사람들은 1858년(1858년) 6월 19일에 미일 통상조약이 조인되어, 다음해 1859년 6월 2일에 요코하마가 개항되고 나서, 존왕양이론이 난무하는 험악한 공기 속에서 때때로 외국인이 원출을 허락받은 로쿠고 근처까지 말로 멀리서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
1853년의 쿠로후네 내항으로 일본은 쇄국에서 개국으로 큰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다.오오로이 나오스케가 칙허를 얻지 못한 채 미일수호 통칭 조약에 조인하자 존왕양이 운동이 높아졌다.야스마사의 대옥, 사쿠라다 문외의 변과 막부 말기의 소란스러운 세태가 이어지는 가운데 구동카이도 나무기 마을에서 외국인 살상 사건이 발생했다.
막부 개혁의 칙명을 막부에 전하는 칙사 오하라 시게토쿠의 호위 임무를 마치고, 에도에서 교토로 돌아가는 사쓰마 번주의 아버지, 시마즈 히사미츠의 일행 4백여명의 대열이 나마무기 마을에 꽂혔을 때, 가나가와 방면에서 말을 달리게 해 온 외국인 4명과 조우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상하이에 거주하는 영국 상인 리처드슨, 그 친구로 홍콩 상인의 아내 보라데일 부인, 부인의 처남으로 요코하마 재류 상인 마셜, 요코하마의 하버드 상회의 클라크는 가와사키 대사 구경에 가기 위해 한가운데 말을 걸었다.4명의 외국인에게 행렬을 경호하는 무사들은 행렬에 가까워지지 않도록 하라며 몸짓으로 요구했다.그러나 영국인들은 다이묘 행렬이 지나갈 때 흙 아래 앉는다는 일본 나라의 습관을 몰랐다.말도 모르고 오로지 우왕좌왕하다가 행렬에 말려들어 버렸다.리처드슨은 줄에서 벗어나려고 말의 고삐를 당겼는데, 마목을 히사미츠가 타고 있는 바구니를 향해 버려, 바구니를 경호하고 있던 제두 나라하라 키사에몬에 베었다.경호 무사들도 깊은 곳을 입은 리처드슨에게 베었다.놀란 말은 심장을 찌른 리처드슨을 태우고, 기병을 돌려 가나가와 방면으로 달렸다.리처드슨은 600m 정도 떨어진 마쓰바라에서 낙마하여 낙마했다.리처드슨이 낙명한 근처에 나마무기 사건비는 세워져 있다.
클라크와 마셜도 상당한 상처를 입었지만 목숨을 걸고 행렬을 벗어나 미국 영사관이 있는 가나가와의 혼가쿠지寺(절)로 도망쳐 도움을 요청했다.모자와 앞머리 일부를 베인 보라데일 부인은 외국인 거류지로 도망갔다.
이 소식을 들은 외국인 거류지는 한때 어수선했지만, 영국의 대리 공사 닐이 일을 하는 것은 득책이 아니라고 판단해 외교 협상으로 즉시 막부에 항의했다.막부에 대해 10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사쓰마 번에 대해서는 배상금 2만 5천 파운드와 하수인의 처형을 요구했지만, 양자 모두 이를 거부했다.
사건의 전말은 영국 본토에도 전해졌다.1863년에는 영국 함대 12척이 요코하마에 내항했다.막부는 황급히 배상금을 지불했지만, 대번 사쓰마 번에 대해서는 약화된 막부에 아무런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사쓰마번은 어디까지나 영국 측으로부터의 요구를 계속 거부했다.영국은 함대를 가고시마로 돌리고 무력행사를 시작했고 사쓰마는 응전했다.그러나 암스트롱 포라는 근대 무기를 목격한 사쓰마 번은 양이에서 개국론으로 돌아서 영국과 평화 협상에 들어갔다.배상금 2만 5천 파운드는 막부에서 ‘해안 방어’라는 명목으로 100년 연부로 빌려, 장래에 영국은 사쓰마에 대해 군함 구입을 알선한다는 조건을 붙여 지불했다.하수인에 대해서는 시한을 정하지 않고 체포되는 대로 처형하는 것으로 흐지부지 처리되었다.그 후 사쓰마 번은 조슈 번과 동맹을 맺어 존왕도막을 진행시켜 시대는 메이지 유신으로 크게 움직였다.
<위의 사진은 나마무기 사건 기념비와 구로카와 쿤>
나라를 흔들었던 대사건도 막부나 사쓰마 번의 엄격한 함구령으로 공개적으로 거론되는 일은 없었다.나마무기인 사람들과 소소한 관계자의 가슴에 간직한 채 시대는 크게 바뀌어 갔다.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날의 생활로 돌아왔지만, 이 사건은 보리 사람들의 마음 구석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소년의 날에 이 사건을 목격하고 사건의 중대함을 인식하고 있던 쓰루미 마을의 구로카와 쇼조가 이국 땅에서 비업의 죽음을 당한 리처드슨의 죽음을 애도하고 사건의 풍화를 막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사비를 투입하여 1883년에 사건비 세웠다.비문은 『서국립지편』의 나카무라 마사나오에게 의뢰했다.적년의 마음의 짐에서 해방된 나마무기 사람들도 협력해 위령제도 실시했다.1911년 8월 21일의 50년 축제는 구로카와 쇼조가 혼자 힘으로 갔지만, 1922년(다이쇼 11)의 60년 축제는 지역의 사람들과 공동으로 성대하게 치렀다.
현재는 나마무기 사람들에 의한 나마무기 사건 현창회에 의해 매년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또한 1994년(1994년)에는 게이힌 급행 나마무기 역 앞에서 주점을 운영하고 있던 아사미 다케오 씨가 20여 년에 걸쳐 모은 나마무기 사건에 관한 자료를 공개 전시하는 나마무기 사건 참고관을 개설했다.아사미는 야마테의 외국인 묘지에 잠들어 있는 리처드슨의 무덤이 황폐해진 것을 우려해, 자비를 들여 개수했다.
2002년 8월 21일에는 나마무기 사건 140주년을 맞는다.
<위의 사진은 기념비 제막식>
문책 「쓰루미 역사의 모임」 사이토 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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