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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스가사와초코시(그 3)
최종 갱신일 2024년 7월 9일
해안 매립과 공장진출
철도 개통
1868년(1868년) 마지막 장군 도쿠가와 게이키는 다이세이 봉환에 따라 새로운 메이지 정부가 수립되어 약 2세기 반 동안 계속된 도쿠가와 막부 봉건 체제는 이곳에 붕괴되었다.메이지 유신에 앞장서 1860년(1860년)에는 요코하마가 개항하여 오랜 쇄국은 끝을 고하고 근대화, 국제화의 물결은 한결타와 스가자와 마을에도 밀려왔다.
메이지 정부는 벌써 1870년(1870년) 도쿄 신바시(新橋)·요코하마 간 철도 건설에 착수, 1872년(1872년) 5월 7일 시나가와·요코하마 간 개통, 임시 영업을 시작해 9월 12일, 신바시·요코하마 간이 전통하여 쓰루미 역도 개업했다.검은 연기를 토하며 힘차게 달려가는 영국제 육증기를 연선 사람들은 호기심의 눈으로 바라보며 놀랐다고 한다.철도 개통에 의해 에도 시대의 대왕환이었던 도카이도는 외로워져 가고, 가와사키주쿠 등도 전마 제도가 없어진 적도 있어 숙소로서는 소멸해 갔다.한편, 일한촌이었던 요코하마무라는 개항에 따라 외국 상사가 처마를 끌고, 생사 수출에 끓는 일본 제일 활기찬 마을이 되었다.
순농촌이었던 스가자와 마을은 이들 사건에 직접 관계는 없었지만, 서양 야채, 과일(배, 복숭아) 등을 만드는 집도 나타나 쌀 이외에 팔 것이 없었던 이 지방에 현금 수입의 혜택을 주었다.
아사노 소이치로에 의한 매립
오다, 시모신덴(지금의 아사노초), 시오다의 해안은 현지 유력자의 손에 의해 이미 막부 말기 무렵부터 개발(간척)이 행해져 왔다.그러나, 얕은 해안은 대부분이 옛날 그대로였고, 물고기, 조개류, 해조류 등 좋은 어장이었다.
실업가 아사노 소이치로는 1896년(1896년) 구미를 시찰, 거대한 공업 지대는 임해 매립지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귀국 후 가나가와와 도쿄 사이의 해안을 직접 실지 조사하여 오다, 시오다 앞바다 해안이 이상적인 적지라고 판단하여 금융계의 야스다 젠지로와 짜고 1912년부터 매립 공사에 착수했다.우여곡절이 있었지만 1913년 영국에서 최신식 전동식 샌드펌프선을 구입하여 이를 가동시켜 본격적인 매립 공사를 시작하여 1922년에 준공했다.이 토지에 아사히 유리, 아사노 시멘트, 일본 강관 제철소, 아사노 조선 제철소, 일본 강관 쓰루미 조선소, 시바우라 제작소(현 도시바), 스탠더드 석유, 라이징산 석유, 미쓰이 물산 석유 등 유력 기업이 진출해, 게이힌 공업지대의 핵심이 되어 갔다
한편 농민이었던 스가자와를 비롯한 이 지역의 사람들은 농업에서 이들 공장의 건설 공사에 종사하여 농업에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현금 수입을 얻었다.시바우라 제작소의 건설 현장에 일하러 간 스가자와의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이 공장은 미국의 GE사를 모델로 한 당시 동양 제일의 최신예 공장이었다고 한다.당시 이런 공장을 짓는 건설회사가 일본에는 적고, 미국의 건설회사가 청부했고, 미국인 기사, 현장 감독이 많이 왔다고 한다.내 아버지의 친구는 초등학교 밖에 없었지만, 미국인의 지휘 하에 일을 하면서 영어를 배우고, 미국인 감독의 신망을 얻어 통역 겸 감독 같은 입장이 되어, 쉬는 날에는 미국인 감독이 스가자와의 집에 놀러 왔다고 한다.
공장이 건설되면 당연히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필요하다.이 지역의 사람들도 많은 사람이 농업을 멈추고, 또는 지금의 겸업농가로 공장 근무를 시작했다.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에도 시대 이래, 일년 내내 허술한 옷을 입고 논이나 밭을 기어다니고, 매운 노동에 일삼으면서, 스스로 만든 쌀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던 영세한 농민에게 공장에서 근무해 급료를 받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고, 큰 변혁이었다.또 전국에서 공장에 근무하는 사람, 하청, 물품의 구입에 출입하는 업자 등의 관련 사람들이 모여, 특히 공장에 가까운 시오다 지구를 중심으로, 주택의 건설이 진행되어, 상가도 활황을 나타냈다.시오다에 인접한 스가자와도 서서히 논을 메우고, 주택이 세우고, 상가도 생겨, 농촌에서 도시로 바뀌었다.넓은 토지를 가진 대백성도 서서히 백성을 멈추고 택지로서 빌려주거나 대가를 짓거나 해서 자산가가 되어 간다.지금의 대도시 교외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같다(그림 8 참조).
가와·운하의 개삭과 교마치, 헤이안초의 탄생
이마헤이안쵸와 옆의 교마치 마을의 도로가 바둑판의 눈처럼 정연하게 정비되어 있다.이것에는 실은 다이쇼 말기에 완성된 가와사키 운하의 개삭과 거기에 따른 공장 용지, 주택용지의 조성에 의해 생긴 것이다.
전쟁 전부터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은 알고 있지만, 현재 게이힌 테니스 클럽의 테니스 코트, 또한 북쪽 및 남쪽의 맨션, 닛토 녹도, 입선 공원, 입선교에서 남쪽으로 통하는 라인에 운하가 있었다.이 운하는 게이힌 전철(게이힌 급행)에 의해 1919년부터 11년에 걸쳐 연선 개발의 일환으로 오다와 스가자와의 경계에 운하를 개삭하고 그 토사에 의해 양안을 매립해 25만 평의 공업용 토지를 조성했다.요코하마 고무, 교조 제작소 등의 공장이 진출했지만, 당시의 경제 불황과 겹쳐 공장 용지로서는 매진될 전망이 서지 않고, 나머지를 택지로서 도로를 정비, 분양한 것이 지금의 헤이안초와 교마치의 거리 풍경이다.
오다, 시오다 앞바다의 매립이 완성되어 대공장이 차례차례로 세워진 시기와 겹쳐, 스가자와는 경지의 주요 부분이 없어져, 단번에 농촌에서 도시로(라고 해도 주택지)로 변모해 갔다.당시의 인수 가격은 평당 1엔 30전에서 1엔 50전으로, 게이힌 전철은 용지 30만평(쿄마치 포함)의 인수비로 39만엔을 계상했다.내가 다닌 헤이안 초등학교 반 안에 헤이안초의 친구가 몇 명 있었다.초기 분양지를 산 사람들의 자녀인 그들의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지만 저택은 백평쯤 되는 세련된 서양식 집에서 스가사와 근처 농가풍의 집이나 나가야가 늘어선 풍경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사는 사람들은 도쿄에서 온 사람이 많았고, 초기에는 유명한 가부키 배우, 화가, 대기업 화이트칼라 등 사회적으로 하이레벨의 사람이 많았다.바야흐로 덴엔토시선 연선 분양지 같은 곳인가.그러나 그 후 공장의 연기, 주변 환경의 악화 등으로 인해 이들은 서서히 떠났다.또한 이 운하는 초기에는 배도 지나갔지만 결국 운하로서는 별로 이용되지 않고, 1941년경부터 일본 강관의 광재에 의해 매립되어 사라졌다(그림 9 참조).
마을에서 마을로
스가자와초는 현재, 행정구획적으로는 요코하마시 쓰루미구 스가자와초이지만, 어느 마을에도 역사와 변천이 있듯이 스가자와초도 몇 개의 변천을 거쳐 현재의 계기가 되었다.
◆에도시대→1868년 무사시 구니타치바나기군 스가사와무라
스가자와 마을은 지명은 에도 시대 초기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1868년 - 1889년 3월 말 / 가나가와현 다치바나기군 스가자와무라
메이지 유신에 의해 이 지방은 무사시국에서 가나가와현이 되었다.
◆1889년 4월 1일→1923년 3월 말/가나가와현 다치바나기군 마치다무라
메이지 정부가 시정촌제의 제정에 따라 몇 개의 마을을 합병시켜, 에가사키무라, 야카타무라, 시장촌, 스가자와무라, 시오다무라, 오노 닛타가 마치다무라가 되었다.이것이 후에 스가자와무라 등이 요코하마시에 편입되는 포석이 된다.또한 스가자와 마을을 비롯한 각 마을은 마치다무라의 대자가 된다.
◆1923년 4월 1일→1925년 3월 말/가나가와현 다치바나기군 시오타초
마을제가 되자 시오다마치라고 개칭하고 각 마을은 구촌명이 대자가 된다.
간토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는 시오다마치였다.
◆1925년 4월 1일→1927년 3월 말/가나가와현 다치바나기군 쓰루미초
시오다초, 쓰루미초는 여러가지 이유로 합병하는 것이 득책이라고 판단해, 합병해 쓰루미초와
나루특히 쓰루미가와 수해 대책을 합동으로 추진해 상수도 및 대지진의 부흥 사업 계획에 대해
더욱 노력하게 됐다.
◆1927년 4월 1일/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쓰루미구 스가자와초
요코하마시에 편입, 동 10월 1일 구정을 실시, 현재에 이른다.
요코하마시에 편입되어 그 후, 구제가 되어 현재의 명칭이 된다.여기에는 개항 이후 발전을 계속해 온 요코하마시가 한층 더 항구 확장을 위해 쓰루미의 해안 지역이 필요했던 것과 공업 도시로 발전하기 위해서도 쓰루미의 임해 지역의 뒤따른 평탄한 토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요코하마시와의 합병에는 반대 운동도 있었지만 우여곡절 이후 실현되었다.이 편입 시 쓰루미 측은 막대한 비용이 드는 수도 사업을 단독으로 실시하는 것보다, 요코하마시에서 실시하는 것이 유리해진다는 판단도 있었다고 한다.
이 편입에 의해 에도 시대 이래, 가와사키 분이었던 쓰루미가와 좌안의 시오다, 스가자와, 시장, 에가사키, 야나타는 본래라면 가와사키시가 되어도 아무런 이상하지 않은 지역이었지만, 요코하마시가 되었다.
스가자와초(마을)에서 사용되고 있던 야호 애칭
전쟁 전까지 토지의 사람은 서로의 집을 야호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옥호라기보다는 애칭이 어울리는 경우도 있다.옛날에는 마을 전체가 농민이고 촌락 운명 공동체이므로 친숙함을 담아 야호·애칭으로 칭한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현재는 유일하게 은거 가게만 훌륭하게 옥호로 사용되고 있지만, 나머지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언젠가 잊혀져 소멸해가는 운명에 있다고 생각된다.애석을 담아 일부 소개하겠습니다.
히가시(노 집)·서(의 집)·남(의 집)·북(의 집)·은거·라오야·테라마에(데라마에, 테라노메)·히라베에돈·
초드산 무케의 집(향쪽의 집)·니츠야마·이크신야·집·외레이(의 집)·하치에무산
(야에몬 씨) · 콘조 님 · 덴도 씨 · 동김 씨
※야호·애칭의 “집”은 “우리”라고 읽습니다.
그림 8:공업지대 매립 쓰루미구 역사에서
그림 9:가와사키운하와 교마치, 헤이안초의 분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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